2015 LEET 언어이해 - 레비의 회색 지대
글 자체가 참 좋음…
삶은 언제나, 어디서나 계속된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일상은 있었다. 수감자들은 적어도 어떻게 살고 죽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었으며, 그 선택의 폭은 상당히 다양했다. 그곳에서도 인간은 행위 주체였던 것이다. 그들은 극한 상황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경험했고, 전유했으며, 행동에 옮겼다. 따라서 얼핏 모순적으로 보이는 '아우슈비츠의 일상'은 존재했으며, '아우슈비츠의 일상사'또한 가능하다.
대체로 역사 서술의 주 대상은 사회 전체나 개인을 움직이는 구조와 힘이지만, 일상사의 관심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사람들 사이의 상호 작용이 어떤 역사적 구체를 생산하고 변형하는지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극한 상황 속의 일상', 즉 '비상한 일상'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공격당하며 무너지고 파멸로 치달아가는 인간성을, 또 어떻게 인간성이 살아남고 소생할 수 있는지를 낱낱이 기록하고 분석하였다.
레비는 '회색 지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비상한 일상' 속의 삶의 양태를 제대로 묘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택한 삶의 방식은 포기와 순응이었다. 그들 중 살아남은 이는 극소수였다. 그는 이들을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비인간'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면 살아남은 사람들의 대다수는 누구인가?
먼저 친위대의 선택을 받아 권한을 얻어 '특권층'이 된 사람들이 있다. 이 '특권층'은 수감자 중 소수였지만, 가장 높은 생존율을 보여주었다. 기본적으로 배급량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음식이 더 필요했고, 이를 위해 크든 작든 '특권'을 얻어야 했다.
그리고 특권은 그 정의상 특권을 방어하고 보호한다. 예를 들어 막 도착한 '신참'을 기다리는 것은 동료의 위로가 아니라, '특권층'의 고함과 욕설, 그리고 주먹이었다. 그는 '신참'을 길들이려 하고, 자신은 잃었지만 상대는 아직 간직하고 있을 존엄의 불씨를 꺼뜨리고자 했다. 또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다. '특권층'이 아니면서도 생존 본능에 의지한 채 '정글'에 적응했던 사람들이다. 체면과 양심을 돌보지 않은 그들의 삶은 만인에 맞선 단독자의 고통스럽고 힘든 투쟁을 함축했고, 따라서 도덕률에 대한 적지 않은 일탈과 타협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회색 지대'는 가해자와 희생자, 주인과 노예가 갈라지면서도 모이는 곳, 우리의 판단을 그 자체로 혼란하게 할 가능성이 농후한 곳이다. 그리하여 '회색 지대'는 이분법적 사고 경향에 문제를 제기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호성이 '회색 지대'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호성의 원천은 다양하다. 먼저 악과 무고함이 뒤섞여 있다. 수감자들은 기본적으로 무고하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정도 자발적으로 다른 이에게 악을 행할 수 있다.
'회색인'의 행위는 무고하면서 무고하지 않다는 역설은 여기서 성립한다. 물론 그가 행하는 악과 나치가 행하는 악은 분명 차원이 다르다. 또 다른 원천은 행위자의 동기에 있다. 예컨대 구역장은 '특권층'으로 일정한 권한을 가진다. 겉으로는 협력하면서도 실은 저항 운동에 참여하는 소수는 이 권한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저항 조직을 위해 또 다른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회색 지대'를 만들었는가? 첫째, 나치는 인력의 부족 때문에 피억압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 협력자들은 한때 적이었으므로, 이들을 장악하는 최선의 길은 그들을 더럽혀 공모의 유대를 확립하는 것이다. 둘째, 억압이 거셀수록 그만큼 피억압자 사이에서 기꺼이 협력하려는 경향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엄혹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동기로 '회색인'이 된다. 그런데 '회색 지대'의 이런 모호성은 심각한 혼란과 곡해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가해자와 희생자가 뒤바뀌고 또 뒤섞이는 상황을 보며, 누구에게도 책임의 소재를 묻기 어렵다고 강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레비가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다른 것이다.
그는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요구한다. 가해자인 나치는 악하며 피해자인 수감자는 무고하다는 단순한 이분법은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그저 수동적인 것으로, 통념이 된 화석으로만 만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한 답변을 얻기 어려운 문제들을 끊임없이 되묻고 통념을 토대에서부터 문제시하는 데 있다. '괴물'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얼굴을 돌리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람은 괴물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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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다 아쉽네